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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자료

니콘 F/F2

by 알엔피싱 2009. 5. 17.

 nikon F / F2

 

Nikon F
일안레플렉스와 교환 렌즈
일안레플렉스 카메라는 렌즈 교환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라고 단언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어떠한 광학계에 달아도 거의 finder로 보았던 대로 찍을 수 있는 일안 레플렉스는,

렌즈 교환기능과 편성했을 때에 그 위력을 발휘한다. 렌즈를 교환하기 위해서는,

렌즈와 카메라 보디의 사이에 착탈 기구가 필요하다. 그 부분은

마운트 라고 불려 호환성을 확보 하기 위해 일정한 약속에 따른 치수·구조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마운트론」에서는, 조임값을 위시하는 각종의 정보 전달 기능이 화제에 오르는 일이 많다.

확실히, 노출계나 AE의 기능을 발휘 시키기 위해서도 마운트 사양은 중요하다.

그러나, 마운트의 본 기능은 「렌즈의 설치자리」에 있다. 교환 렌즈용으로

여러 가지 타입의 광학 설계가 가능이고, 또 그것들을 필름면에 대해서

올바른 위치로 유지할 수 없으면 안 된다.

Nikon F
렌즈 성능이 우선이라지만...... 
아는 바와 같이, 니콘의 긴 역사에서 닉코르 렌즈는 항상 높은 평가를 얻어 왔던

만큼 니콘에 있어 렌즈의 성능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거기서, 일안 레플렉스 카메라를 설계 하기에 즈음 해, 광학 설계의 자유도와 설치

안정도를 요구해, 개발 시점에서는 어디에도 없었던 대구경의 신바요넷트 마운트가 채용되었다.

구경이 큰 것은 확실히 높은 사양·성능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유리하다.
그런데, 렌즈에 있어 일안 레플렉스에는 상당히 귀찮은 면이 있다.

finder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는 리플렉스 미러이다.

렌즈를 분리했을 때 마운트 내부로 보이는 기울어진 거울이 리플렉스 미러이다.

이 미러는 촬영마다 움직이므로, 렌즈는 그 최후부가 부딪치지 않게 앞쪽에 배치된다.

알기 쉽게 말하면, 일안 레플렉스에서는 카메라 본체에 대해 렌즈 전체가

미러의 앞부분에 나와 장착되는 것이다. 이 필름면으로부터 렌즈 광학계 후부까지의

거리를 전문적으로는 백 포커스(Bf) 라 칭한다.
「니콘 F」의 마운트는 이 Bf 양도 최대급이다.

카메라 보디의 중앙부가 당시의 일안레플렉스 중에서도 특히 「두껍다」는 것인다.

이것은 보디의 미러 작동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점에서는 좋지만,

렌즈의 소형화에는 불리하고 렌즈 구성에도 제약이 더해진다. 이와 같이 장단점이

혼재하는 미묘한 수치 설정으로 F 마운트는 시작 하고 있는 것이다.

미묘한 선택이 절묘한 선택에 
그러나, 그 후 니콘은 「 F 」용 렌즈의 개발에 대단한 지력을 발휘해,

다채로운 렌즈군을 높은 성능으로 계속 제공하면서 F마운트를

적절한 규격의 마운트 로 해 버렸다.

특히 28mm 이하의 촛점거리의 광각렌즈는,

차례차례로 보다 와이드에, 보다 밝고, 보다 소형으로 되어

백 포커스의 핸디캡을 날려 버려 버렸다.
또, 보디 본체의 미러에 대해서는, 「니콘 F2」에서 finder 시야의

외관이 거의 어둡게 되지 않는 긴 미러를 실현해, 보디·렌즈

모두 충분한 기능을 실현할 수 있는 마운트인 것을 실증 했다.
니콘 F 의 뒤부터 처음에 계획된 내외의 일안레플렉스 마운트를 보면,

신기한 것으로 구경과 백 포커스가 「F 마운트」에 가깝다.

그 치수의 부근이 절묘한 밸런스인지도 모르다.

F 마운트는 역돌림?
F 마운트에서 실현된 새로운 기능, 예를 들면 셔터 속도와 조임의

쌍방으로 노출계가 연동해 간단하게 노출 조정을 할 수 있는 것,

초망원 렌즈나 쥼 렌즈에도 영향을 끼친 완전 자동 조임

(평상시는 전개로 finder를 밝게 하지만, 촬영중만은 설정 조임이 되는 장치) 등,

대부분의 것이, 기획 의도 대로 호평을 받았다. 일안레플렉스화를 위해 좋다고

생각되었던 것은 모두 채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도 TTL 노출계·전기 셔터에 의한 자동 노출·오토 포커스의 각 시대에 있어,

기본 부분을 바꾸지 말고 최신 일안레플렉스의 마운트로서 계속 책임을 다하게 된다.

그리고 최신의 고성능기니콘 F5 에도 물론 「F 마운트」는 계승 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는 「친숙해 질 수 없다, 사용하기 어렵다」라는 지적을 받은 것도 있었다.

그 하나는, 「렌즈 장착시의 회전 방향이 인간의 감각과 반대」라고 하는 것이다.

렌즈를 마운트에 맞혀 반시계방향(왼쪽이군요)으로 돌려 장착한다.

또, 「렌즈의 포커스 링을 돌릴 방향이 시중의 대다수의 렌즈와 반대」

라고 하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래부터의 손님을 소중히 한다」는 폴러시 현상으로,

지금까지의S용 렌즈 유저가 당황하지 않게 각각의 회전 방향을 가지런히 했던 것이다.

그런데,S 용 렌즈의 착탈과 포커스 링의 회전 방향은,

마운트 형상이 공통된 「바이텍스」와 같았다.

퀵 리턴 미러·완전 자동 조리개
SP 를 스트렛치 한 보디 
finder, 마운트를 봐 왔지만, 여기서 다른 기구도 보자.

미러 기구는 1 개의 용수철로 상승·하강 양방향에 구동하는 독특한 퀵

리턴 미러(촬영중만 튀어 직후에 자동적으로 원래대로 돌아간다).

미러를 상승 위치에 고정 할 수 있는 「미러 업 장치」를 가지는 것도 특징이었다.

이것에 의해 약간 늦게 등장하게 되는

초광각「NIKKOR-O 21mm F4」렌즈나 어안 렌즈도 사용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먼저 말한 것처럼, 니콘이 레트르 포커스(역망원) 타입

광각렌즈를 적극적으로 개발했기 때문에, 이 장치를 사용하는 빈도는

점차 감소 해 나가게 된다.

그러나 미러에 의해 일어나는 카메라 치우침을 최소로 하고 싶은

촬영에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그런데 미러 기구는 「니콘 SP」이전에는 없었던 것으로 넣을 장소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서 니콘이 선택한 방법은 「SP」의

본체부를 좌우에 잡아늘여 횡장으로서 넓힌 중앙부에 미러 기구를 두는 것이었다.

그 결과 「니콘 F」는 약 1,000 점의 부품 중 거의 40% 를 「SP」와

공용하게 되었다.전번 접한 것처럼, 「F」는 「SP」보다

늦게 발매되었지만 개발 기간은 동시에 진행됐었다.
또 「SP」에서는 「S2」까지의 셔터 기구를 큰폭으로 개량해

성능이나 편리한 사용이 현격히 향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두개의 일로부터 이 작전은 당연한 일과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세상의 상식은 그렇지 않았다.

4 축식 focal plane shutter(위)와
「니콘 F」의 셔터(아래)
모두를 잘 거두는 구상력
앞의 미러 기구의 장소 만들기에는, 투시 finder 카메라용의

focal plane shutter가 아니고, 당시 일안레플렉스 방향이라고 봐지고 있던

4 축식 셔터를 채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자세한 것은 생략 하지만 셔터막을 감아 꺼내는 통을 아주 가늘게 하는 방법이다.
그것에 대해 「SP」의 셔터를 사용한 「F」는 동클래스의

일안레플렉스 중에서 특히 가로폭이 넓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았다.

실은 여기에 니콘 설계자의 카메라 레이아웃에 대한 원모심려가 있었다.

F」를 두고, 미러 기구와 완전 자동 조리개는 심플하게 미러부한쪽

편에 하나의 기구로 끝마치고 있다.

그 당시 다른 일안레플렉스는 미러부의 좌우 2 곳, 혹은 좌우와 아래3 곳에서

이 2 개의 일을 시키고 있었다.

「F」보다 기구의 스페이스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있다.

그 때문 일안레플렉스용으로는 카메라 통째로의 신설계를 행하는 예가 많았다.
이와 같이 「SP」의 발전형태라고도 말할 수 있는 「F」는

자매기 「SP」/「S3」/「S4」/「S3M」시스타즈와 같은 조작부재 배치가 되어

병용 촬영에 편리한 것, 카메라를 잡았을 때에

오른손측이 잡기 쉬운 것 등의 부차적인 이점도 가졌다.
「니콘 F」는 결코 부품 수가 적은 간결한 카메라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예로 든 것처럼, 차례차례로 좋은 시도가 태어나 가는 것 같은, 

잘 가다듬어진 구상을 여기저기에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F」의 셔터라고 말하면 티탄막을 잊는 이유에는 가지 않는다.

어렵게 개발에 성공한 순티탄의 셔터막은 태양광에 의해 셔터막이 타는 걱정도 없어졌다.

현재 티탄은 어디에라도 볼 수있게 되어,

카메라 고급품의 외장에 채용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39년전 이미 「F」의 셔터에 채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셔터 부품을 공용하는 선행 기종의 「SP」

도, 「F」의 발매를 기회로 당초의 포막에 대신해 티탄막이 되었다.

「Nikon F Photomic」
니콘 F 와 시리즈의
성공 요인 
「니콘 F 와 전용 교환 렌즈·액세서리는 1959년 5월에 발매되었다.

호평 중에, 그 후도 강력한 모터 드라이브와 그 주변기기,

압도적으로 풍부하고 특수용도전용까지 갖추어진 F 용 닉코르렌즈군,

선진적인 전용 스피드 라이트 등 수많은 제품이 차례차례로 개발되어

카메라 역사에 유례 없는 장대한 만능 시스템이 쌓아 올려져 가게 된다.
「니콘 F」는 카메라 단독의 가치도 물론 높게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 외에, 그러한 발전성이 있는 니콘 일안레플렉스

관련 상품군의 개조라고 해도 높게 평가되어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교환 렌즈나 액세서리를 포함한

종합적인 구상에 선견성이 있던 것과 먼저 예를 든 것처럼 개개의 제품도

깊이 생각해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그것들은 올바르다. 그러나 본질은 좀 더 단순한 곳에 있는 것은 않은가. 「

니콘 F 의 보디와 교환 렌즈의 사이에 있는 완전 자동 조임의

기구가 합리적으로 순조롭게 기능해, 그 후부터 변경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서 니콘?? 어려움 없이 많은 주변 제품과 ??

개량판의 개발·생산에 몰두할 수가 있어 한층 더

그것을 착착 겹쳐 쌓아 갈 수가 있었다.

그 작은 부분의 성공이 그 후의 큰 성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는지.

거기서 신형 보디와 대응하는 신렌즈를 개발하려고 했었더라면

어떠했을까도 생각해 봐야 한다.
전체의 구상도 중요하지만 세부의 설계도 이것 또 중요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발매 당초의 「Nikon F」
F 의 명성은 어디에서
1959년 5월에 「Nikon F」가 발표되었을 때 일본 광학 공업이 내건 설계의 포인트는,
1. ) 최선의 품질,
2. ) 사용이야 마을 다능성,
3. ) 자동화
에서 만났다.

한편, 많은 유저의 사용 실적으로부터 본 평가를 정리하면(자),
A. ) 고성능으로 풍부한 F 용 닉코르렌즈군,
B. ) 발군의 내구성,
C. ) 일안레플렉스의 결점을 최소로 한 편리한 사용,
D. ) 모터 드라이브 등 넓은 촬영 영역을 커버 하는 고성능으로 광범위한 액세서리
(이)가 된다고 생각된다.

보기좋게 개발측의 생각이 쓰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전혀(완전히) 같은 항목이 되지 않는 것은, 필자의 분류가

어긋나고 있을 뿐(만큼) 인 것인다. 표면상의 방침상에서는

모든 카메라로 이 바람직한 관계는 성립하고 있을 것이지만,

여기까지 실체가 수반하고 있는 예는 몹시 드물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자), 그 배경에는 일본 광학

기술진의 의외로 단순한 발상이 보여 오는 것이다.

일안레플렉스∼ 「잘 수 있는 거인」 
「니콘 F」개발의 동기나 목적(겨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안레플렉스의 역사와 당시의 동향을 알 필요가 있다. 참고 견뎌 교제를 바라고 싶다.

일안레플렉스 렉스라고 하는 finder 형식은, 이미 16 세기에는

카메라오브스큐라(사진 발명전의 렌즈부어둠상자로,

풍경등을 스케치 하는 장치)의 1 타입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진 기술이 탄생 한 후도, 대형 일안레플렉스

등의 형태로 여러가지 카메라 중(안)에서 살아 나갔다.
그 사이는 완만한 진보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지만,

1930년대 후반(쇼와 10년대)이 되면(자) 당시의 기술의 흐름을 반영해

35mm[135]판단 필름용의 일안레플렉스도 등장했다.

망원 렌즈나 근접 촬영에 편리한 일안레플렉스식 finder와 35 mm소형

카메라의 특성이 더해 합쳐졌던 것이다. 그러나, 35 mm카메라로서는

다음에 접하도록(듯이) 취급이 불편하고, 「라이카」나 「코닥크레치나」

등의 투?finder 카메라의 (분)편이 속사성이 있어 압도적으로 사용하기 쉬웠다.

여기까지의 일안레플렉스는, 큰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아직

그것을 꺼내는 주변 기술이 불충분했기 때문에 있다.

그런데 , 제2차 대전 후에 유럽에서 몇개의 5각 프리즘(에이레 벨)

finder부의 일안레플렉스가 등장했다.

이것은 숙여 좌우역의 경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지금까지의 (웨스트 레벨 finder 첨부의 ) 일안레플렉스의 결점의

하나를 해소하는 바야흐로 명안이었다.
이 기술에 대한 일반의 유저의 관심은 대체로 낮았지만,

한편 카메라의 개발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이 주목되었다.

유저에 있어 이 finder의 개량은 작은 진보에 지나지 않고,

그 외에도 번거로운 결점이 있었기 때문(에) 일안레플렉스를 상용하는 것은 변함 없이

곤란했다.

그 결점을 여기서 만약을 위해 복습해 둔다.
우선 핀트 맞댐때에는, 렌즈의 조임을 수동으로 전개로 해

finder상을 밝고 한편 심도를 얕게 한다.
핀트를 맞추면(자), 의도하는 조임값까지 수동으로 좁힌다.

이 조작을 잊으면(자) 노출 오버.
다음에 셔터를 누른다. 시야가 깜깜하게 된 채로가 되어,

셔터 찬스의 좋다악 해 불명, 피사체가 어디에 갔는지 알지 않는다.

감아올리면(자) 미러가 복귀해 finder가 겨우 밝아진다......,
등 지극히 번잡한 조작이 필요했다.

한편, 카메라 개발의 프로들은 일안레플렉스를 「특수용도의 카메라」

로부터 「보통 카메라」에 만들어 바꾸는 실마리를 5각 프리즘(에이레 벨) finder에 찾아내,

다른 결점을 기술로 어떻게든 극복 하고 가면 훌륭?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일안레플렉스 연구는 갑자기 활기를 나타내게 되었다.
물론 일본 광학의 기술자도 일안레플렉스가 가지는 큰 가능성에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SP 와 F 의 병행 개발
1955(쇼와 30) 년, 일본 광학에서는 「라이카 M3」에 대항해

그것을 능가 하기 위한(해),「니콘 S2」(1954년)의 후계기로서지금까지 없는

레벨의 "슈퍼 니콘"「SP」의 개발을 본격화 시키고 있었다.
한편, 「S2」까지의 카메라 보디나 교환 렌즈의 카이하츠를 통해 투시

finder와 연동 거리계의 한계도 느끼고 있었다.

더욱 더 밝아지는 교환 렌즈나 촬영 영역의 확대에 대해,

핀트 맞댐 정밀도가 부족해 finder 시야는 부정확한 것이었다.

또 교환 렌즈용의 외부부착 finder에서는 핀트 맞댐은 할 수 없고

시야도 애매한 등이 많은 문제점이 드디어 절실한 것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그것들을 한꺼번에 근본으로부터 해결하는 책으로서 일안레플렉스의

기술 검토도 진행시켜 나가게 되었다.

게다가 할 수 있어 「SP」라고 동일한 속사성이나 편리한

사용을 일안레플렉스에 갖게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어,

거기서 후퇴해 무슨 해결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숨겨, 「F」의 구상은「SP」개발중에 스타트 했다.

그것까지 일본 광학에서는「니콘 카메라(통칭 "니콘 I (형태)")」

이래 후계기를 차례차례 개발해 왔지만, 여기서 이례적의 2 기종 병행 설계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당면은 「SP」의 개발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에 제2순위의 프로젝트로서 진행되었다.

초대형물 카메라, 「SP」의 개발도 1957년에 들어가면(자)

간신히 고비를 넘겼다. 거기서 2월부터 「F」의 개발에도 전력 투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사이에, 국산 펜타레후의 원조인 「미란다」

에 가세해 「아사히펜 세금」이 등장하고 있었다.
한층 더 「F」의 개발중에는, 「미놀타 SR-2」, 「즈노」 등 당시의

일안레플렉스의 3 대담한 기술방법인 5각 프리즘·퀵 리턴 미러·완전 자동 조임을

갖추어 투시 finder 카메라와 전혀(완전히) 같은 쓰기 쉬움을 가지는 신세대

일안레플렉스가 차례차례로 등장해 버렸다. 게다가 안에는 대히트 일안레플렉스도 나왔다.
또, 「F」의 독자 구상 중 몇개의 것은 그것들 선행 기종으로 실현되어 버렸으므로,

착수는 빨리 도 진행이 늦었던 일본 광학의 일안레플렉스 개발은 많이

스피드업 되었던 것이다.

발매 당초의 「Nikon F」의 배후
S 시리즈에의 불만  
이와 같이 일본 광학의 일안레플렉스는 외관상은 최후발로 가까운 시일내에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구상은 반대로 최첨단이었다. (이)라고 하는 것보다 일안레플렉스로

사진에 어떤 진보를 가져올 수가 있을까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결과적으로 차라리 처를 가는 기획이 된 것일 것이다.
다른 니콘의 개발 이야기에도 가끔 나오지만, 최초의 니콘 카메라가 태어난 후,

머지않아 그것들이 사진의 진지한 승부의 장소에서 사용되는

프로 기재로서 활약을 시작했던 것(적)이 「F」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 교환 렌즈가 사용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국산의 렌즈 교환식 카메라는 가능성으로서는 교환기능을 가지고 있어도

실제로는 거의 표준 렌즈로 사용되어 광각·망원 촬영에서의 불편은 그다지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데 「니콘 S」나 「S2」에서는 3.5cm 렌즈는 물론,

2.8cm 나 10.5cm 등도 상용되어 정확한 구도 결정이나 핀트

맞댐은 정말로 지상 명제였던 것이다.
거기서, 「니콘 SP」에서는 오훈 출발해 2.8, 3.5cm 와 5, 8.5, 10.5, 13.5 cm의

finder를 내장 한다고 하는 M 형태 라이카에서도 당시는 할 수 있지 않았던

정교를 궁극초고급 카메라가 되었다. 그 다른점에서도 소형 정밀 카메라로서

가능한 한의 일(것)을 했지만, 변함 없이 프레임을 내장 하고 있지 않은 촛점거리에서는

외부부착 finder가 필요했다.
또, finder 시야에도 안전률이 필요이고, 항상 보이는 범위 이상이

비치는 헛됨을 어쩔 수 없게 여겨졌다. 물론 근접 촬영 등은 대대적인

나누기에는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 때문 「S2」나 「SP」에 대한 유저의 높은 평가와는 정반대로,

완전주의의 일본 광학의 기술자 집단에 있어 욕구 불만이 많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 생각이 「F」로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F 는 바야흐로 일안레플렉스  
「니콘 F」의 구상에 즈음해서는 「투시 finder나 이중상식 연동

거리계에 대해서 일안레플렉스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가 ?」

라고 하는 시점에서 철저하게 깊이 생각해졌다.
한층 더 또 하나의 시점으로서 「일안레플렉스의 결점은 무엇인가 ?」(을)를

세부에 이를 때까지 생각해 결점을 경감하기 위해서도 모든

노력이 지불해지고 있다.
일안레플렉스화의 효과를 최대로 하기 (위해)때문에, 그 장점을 펴 결점을

작게 한다고 하는 당연한 발상이, 당연하지 않은 레벨까지 철저함있는 것이다.

너무 정통적이다라고 하는 것이 독특하다. 이것이 먼저 말한 「단순한 발상」의 정체이다.
이 발상으로부터 태어났던 것이 「finder

시야율 약 100 %」, 「finder 스크린 교환」, 「finder 교환」,

「대구경 바요넷트마운트」, 「미러 업 장치」, 「완전 자동 조임」등의 사양이다.
여기서 이러한 사양이 얼마나 일안레플렉스가 가지는

본래의 특성을 살리고 있을까를 보고 가기로 한다.

일안레플렉스의 시야는 정확  
우선 ?? 100 % 의 finder 시야율이지만, finder의 시야테두리와

촬영 화면테두리를 전혀(완전히) 같은 사이즈에 만들면,

일안레플렉스는 촬영 렌즈를 양쪽 모두의 기능에 공용하고

있기 때문(에) 본 채로의 범위가 비친다.

이것은 35mm(135) 판단과 같은 소화면 사이즈에서는 트리밍이

불필요하기 위해(때문에) 사진확대 배율은 최소로 끝나, 좋은 화질·입상성에 직결 한다.

한편 투시 finder에서는, 어떠한 시차나 촬영 범위의 보정

장치를 가지고 있어도, 반드시 발생하는 기계적·광학적 오차를 전망하면

무한원(∞)에서는 시야율은 90 % 정도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일안레플렉스에서도 이 때문에가 정밀한 조정은 필요한 것은 있다. 그러나

한번 짜서 이루어지면 그 정밀도는 절대적이다.
이 조정을 생략하기 (위해)때문에 시야율 90 % 정도의 일안레플렉스도 있지만,

그 경우, 후에 등장한 24mm 렌즈 등은 finder로 보면 28mm 렌즈에 밖에 안보이다.

화각이 풀에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있다.
이것들은 많은 유저에 있어 사세(함차이)인 (일)것이지만, 고도이고 엄밀한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때문에)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finder 교환 시스템
finder와 스크린은 교환식  
finder상이 만들어지는 스크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일안레플렉스·2눈리플렉스 카메라로 Fresnel screen의

유무를 비롯한 방안·스프릿트이메이지·십자선·공중상 등 여러가지

종류의 것이 이미 이용되고 있었다.

이것들은 피사체에 의해 어떤 것이 적당한가 일률적으로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일안레플렉스 카메라는 일반 촬영은 원래, 천체·현미경 촬영 등에도

넓게 이용되는 것이다.
거기서 「니콘 F」에서는 유저가 상황에 따르고 그것들을

스스로 교환 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말에서는

간단하다 해, 또 할 수 있어 오른 것을 보면 뭐라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테두리에 들어간 스크린 유니트를 한정된 스페이스의 finder 주변에

거두는 것은 용이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에이레 벨 finder를 떼어내 다른 finder에 교환 할 수 있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유행으로부터 보면 차라리 구식인 사양에 속한다.
5각 프리즘이 등장하기 전의 일안레플렉스는, 웨스트 레벨 finder가 표준이었다.

그 위에 펜타를 부록으로 추가했기 때문에,

자연의 형편으로서 5각 프리즘은 착탈식이 된 카메라가 많다.

착탈할 수 없는 (분)편이 새로운 컨셉트로, 「F」에 선행하는

다른 일안레플렉스에서도 finder 고정식의 정리와 경쾌성을 팔 물건으로 하는

A레벨 전용 기회로 인기가 모이고 있었다.
그러나, 니콘은 반드시 A레벨 촬영 방향은 아닌 특수한 용도에도 종래부터

중용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소 카메라가 커져도 교환식이라고 했다.

물론 스크린 교환을 큰 개구부에 의해 주어 쉽게 하는 목적도 있었다.
이러한 교환 시스템은 독자인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finder 시야에는

반드시 쓰레기가 들어간다. 그러나, 그것을 용서로 사용 할 수 있는

유저를 위한 사양인 것이다.

 

 

 nikon F2

파인더 부분을 보시면 AS A ...^^ 같은바디를 사용하지만 파인더에 따라 성능과

가격의 차이가 있읍니다.  

F-2 블랙바디 79 시리얼입니다.

니콘크럽 김수현공제그립이란 제품을 구해서 달아보았는데

생각보다 완벽한 완성도를 보여주더군요...(강추...ㅋㅋ) 

SLR 크럽에서 활동중인 김**님이 만든 공제그립 아랫면 모습입니다.

 F2 A .AS 그립을 장착한 모습과 원래의 상태...^^

아래사진은 25주년 기념바디 입니다...^^

 

Nikon F2
역시 선대 「니콘 F 」로부터
1959년에 등장한 「니콘 F」는 당초부터 최고급 일안레플렉스로서 유명하였다.

그러나 후년과 비교하면 그렇게 뛰어난 인기도는 아니었다.

당시의 35mm [135] 일안레플렉스 중에서는 대단히 고가격인 것에도 원인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되는 동안에 점차 그 실적이 높게 평가되어 이윽고

신화에 가까운 평가를 획득해 갔다.
그 포인트를 특별히 말한다고 하면

첫 번째로 신뢰성 두 번째에는 만능성일 것이다.

그 튼튼함과 교환 렌즈나 액세서리의 풍부한것에 있어서는 어떠한 장르의 카메라도 초월 하였다.
교환 렌즈는 물론 닉코르이기 때문에 전력투구로 개발되어 광학 성능

기계적 정밀도가 우수한것은 물론 매우 특수한 분야의 것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또 액세서리에도 독특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1959년이라고 하는 35 mm일안레플렉스 카메라에 있어 메카니즘상의

대발전기의 함중에 등장한 「니콘 F」는, 이윽고 기구상의 낡음이 눈에 띄게 되었다.

Nikon F2 Photmic A
Nikon F2 의 다이캐스트
새롭고 낡은 「니콘 F」 라고 하면 사람들은 릴리즈 버튼이 누르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 것이나

손가락이 불편한 감아올리기 레바를 연상할지도 모르지만

이것들을 일부 교환으로 수정하는 것 등은 기술적으로는 용이한 것이었다.

실은 좀 더 근본적인 곳에 기술의 낙후성이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1대의 카메라안에 2 계통의 작동 루트가 있는 것이나

미러의 위치 결정 방법 셔터의 요금이나 주행 메카니즘 등을 들 수 있다.
이것들에 의한 사진 촬영상의 약점이란 무엇인가 ?  

인과 관계에 대한 기술적 설명을 생략해 결론을 말하면 핀트 정밀도나

셔터 정밀도에 악영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매우 작은 부분으로 억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일본 광학의 부품 가공이나 조립 기술로 커버 되어 있어

카메라로서의 정밀도는 물론 최고 수준에 있었다.
제품 컨셉과 시스템성은 언제까지나 최첨단의 것이었지만

롱런 제품을 위해서 설계상은 낡아져 버린다.
실제 「니콘 F」를 세상에 배웅한 뒤 기술진은 1963 년 즈음부터

세대의 시작품을 만들어 검토를 처음 한다.
기본적인 과제는 먼저 말한 셔터의 운동 부분을 보다 간결하게 복구를

이루어 막속을 향상 시키고 셔터 속도를 안정 시키는 것 미러와 셔터의 제휴를

합리적으로 하는 것등으로(이며) 있었다.

그 외에,「니코마트 FT」등과 같게

노출계 연동 메카니즘을 카메라 본체에 두어 연동 정밀도를 향상 시키는 수정도 행해졌다.
이러한 시작품은 차기 제품에 직결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후의 제품판 「니콘 F2」의 앞을 가는 것 같은 대담한 시도도 된 것 같다.
그러나 이후에 수 대째로 해 이러한 기술 검토기에 피리어드가 맞아

드디어 「 「F」의 다음」을 목표로 한 개발이 시작하는 것이다.

후계기의 개발 시작하다  
먼저 접한 것처럼 「니콘 F」는 모든 촬영 분야에서 좋은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철저하게 비판을 받은 것은 그 조작 방법 조작부 사용감 이었다.

조작부가 모나게 생겼고 작기 때문에 손에 아프다,

되감기를 끝낸 후 그것을 해제하는 것을 잊는 착탈식리개의 불편함

포토 믹을 시작으로 하는 finder 가 제대로 장착할 수 없다,

모터 드라이브의 착탈이 불편하다, 망원 렌즈로 finder 시야 상부가 어두워진다,

미러 업이 자유롭게 할 수 없다......등 매우 많은 문제가 있었다.

광학 기계로서 우수한 성능을 가지는 만큼 불필요하게 그것들이

눈에 띈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서 손님의 소리에 응해 「니콘 F」의 결점을 정리해 단번에

해소 하기 위한 개발이 시작되었다.

물론 기술자에 있어 용서된다면 내부 기구를 일신 하고 싶었던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1968년 봄의 일이었다.
덧붙여서 그 때의 니콘 제품의 판매 상황을 보면「니콘 F 」는 발매 후

벌써 9년이 경과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애 대수의 약 1 / 3 에 해당하는

누계 약 30만대 밖에 출시하고 있지 않았다.
이 때「니코마트」는 이미 2세대째의 「 FTN」 가 되어

있었지만 「TTL 측광+닉코르렌즈」의 구가해 불평으로 대히트 하고 있었다.

이 「니코마트」인기에 선도되어 그 후의 「니콘 F」의 대붐이 도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은 일본 광학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역사에 "만약" 은 없다」라고 말해지지만 좀 더 빨리 「F」의 붐이 왔다고 하면

후계기의 개발은 연기되었을지도 모르다.

한층 더 망상을 씩씩하게 하면 개발이 연기가 된 분만 후계기의 내용은 보다

새로워져 「F2」는 전기 셔터 자동 노출,「F3」 는 모터 드라이브

내장 메뉴얼 포커스 그리고「F4」 는 지금의 「F5」에 가까운 성능의 AF기회로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A카메라
그런데, 이 카메라의 개발 명칭은, 당초 「F `」였지만, 가을에는 「A 카메라」

라고 개칭되었다.
A 카메라」는, 먼저 든 F 의 결점을 해소함과 함께

호평인 니콘·모터 드라이브 시스템이나 TTL 측광을,

보다 한층 발전 시키는 것을 그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또 「F」에 없었던다중 노광 장치나1 / 2000 초 셔터의 실현도 시야에 넣을 수 있었다.
보다 쓰기 쉬운강력판「F」」라고 하는 것이 그 컨셉트이다.
이 목적을 따라 기본 구성을 재차 검토한 결과 「니콘 F」베이스의 개설합계에서는

개발 불가능하다라고 하는 것이 알아 완전한 신설합계로 가게 되었다.

여기에 F 발매 이후의 수많은 시작으로 겹쳐 쌓은 학습 성과가 살아 오게 된다.
숨겨 2 대째의 「니콘 M」로부터, 「F」까지 쌓아올려 온 역대 니콘의

모델 체인지 법칙으로부터 빗나가 니콘 카메라(통칭 I 형태) 이래

오래간만에 흰색지 설계가 베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덧붙여서 이것을 계기로 「F3」, 「F4」, 「F5」라고 대 들 흰색지

신설합계가 계속되게 된다.

A 카메라」의 보디의 설계에 대해서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수많이 볼 수있다.
예를 들면 셔터의 요금법, 릴리즈법 구동 용수철통의 구조 등은,

올드 라이카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난 것으로 「니콘F」보다 1.4 배도

빠른 막속이나1 / 2000 초를 실현하는 키로 되어 있다.
그 외 티탄을 리플렉스 미러테두리에 채용해 시야 차지고가 거의 없는 긴

미러를 F 보다 아득하게 고속으로 작동 시키는 등 기계식 카메라로서

모든 곳에 이상해를 요구하는 노력이 지불해지고 있다.
또 모든 작동을 당시의 기술적 한계까지 강력하고 빠르게 하고 있다.

이것에 의해 성능상은 비싼 안정성을 얻을 수 있지만

한편 내구성을 유지 향상하기 위해서 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Nikon F2 Photmic」 + 「MD-1」
잘 하는 재주의 모터 드라이브 
전의 모델에 이야기가 돌아오지만, 니콘 및 「니콘 F」의 강도의 하나에

모터 드라이브가 있다.
이것은 당시의 어느 카메라도 누르는 것으로 모터 드라이브 「F-36」+직결식

배터리 케이스의 콤비는 진정한 의미로 사진의 세계에 모터 드라이브 시대를 가져왔다.

그 획기적인 기동성에 의해 온 세상의 모든 장면에 모터

드라이브가 감아올리고 소리가 울리게 되었다.

이것은 이것으로, 머지않아(그 중) 소음으로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만

토끼도 모퉁이도 프로나 하이레벨 유저의 하나의 신분 증명서로 되어 있었다.
또, 긴모터 드라이브 「F-250」도, 과학적인 기록이나 업무용으로서 각 분야에서

중용 되게 되었다.
아무래도 다음번의 「F 이야기」의 선취가 많아졌지만

A 카메라용으로서 이 모터 드라이브를 좀 더 강력하고 고성능으로 해

취급도 용이하게 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감아올리고 속도를 4 구 / 초로부터 5 구 / 초에 고속화

전?권반환의 신설, MD매수합계의 자동 복원 등을 그 기둥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독특한 것은 카메라의 저면에 구멍을 뚫어 그곳으로부터 필름을

모터로 되감는 구상이다.

이것은 해외의 유명 필름 메이커가 파트로네 spool의 되감기 키를

종래와 반대 측에 추가하는 것을 파악한 것으로, 유명 필름 메이커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 방식을 채용한 것이다.
이러한 개발 명칭 A-36,A-250 로 불린 모터 드라이브의 개발도 약 반년 늦게 진행하고 갔다.

전용 스피드 라이트의 레이디 라이트를
I 부분에 내장
finder는 포토 믹 FTN를 기본 
그런데, 「니콘 F2」 중, 「니콘 F」라고 제일 닮아 있는 부분은, finder의

구성일지도 모르다.
니콘 F」는 finder 교환식이었기 때문에, 도중부터 TTL 측광을 채용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포토 믹TN」finder에서는, 중앙부중점 측광이 되어 「니코마트 FTN」라고 줄서

노출계로서의 성능은 대호평이었다.

거기서 보디 본체 내에서 측광 하는 이른바 보디 측광에는 발을 디디지 않고

교환 finder로 측광 하는 방식이 답습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장착 방법의 변경 감아올리고 레바 스윗치에 의한 노출계 전원

자르는 것을 잊고 방지 레이디 라이트의 I 부분 내장 등 세세한 개량이 수많이 베풀어지게 되었다.

NASA 카메라로부터 A 카메라에
A 카메라의 개발 시기는,아폴로·스카이랩용 「NASA 카메라」 의 개발 시기와 겹친다.

그 때문에, 「NASA 카메라」의 경험이, 「A 카메라」·

A 카메라용 모터 드라이브는 여기저기에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우주선 속에서 불꽃을 내지 않게 모터 드라이브의 중계가

트랜지스터에 옮겨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가 그것은 그대로 신형에 이식되어 있다.
이러한 기술면의 달리 조작계나 디?愍括? 개량에도 「NASA 카메라」의

선례가 도움이 되고 있다.

우주비행사의 장갑으로도 조작 할 수 있는 감아올리고 레바는

그 대표예로 「A 카메라」에도 넓은 면적의 손가락 대고 부가 설치되었다.
또 인간이 접하는 모든 모퉁이가 둥그스름을 띠어

직선적인 「F」란 대조적인 마무리가 되었다.

Nikon F2 Photmic A 의 컷 모델
니콘 처음의 양산 시작 
오랜 세월 만들어 익숙해진 「니콘 F」의 모델 체인지는

일본 광학에 있어서도 대단한 긴장감을 수반하는 대사업이었다.

거기서 만전을 기 쓸모없게 되고 째, 시작으로부터 양산에 직접 이행 하는

종래 방식을 고쳐 양산 시작 즉 프리프로다크션테스트를 사람 단계

추가하는 편책이 취해졌다.

시작 단계의 손수 만들기와는 달라 본격적인 형태로 만들어진

부품을 양산과 같은 프로세스로 조립해 모든 공정의 익숙도를 향상

시키고 나서 발매하는 것이다.
양산 시작은 1969년 3월에 스타트 했다.

카메라 명칭은 「UF-1」라고 되어 제1차라고 해 우선 20대가 만들어졌다.
그 후 양산 시작은 수차에 걸쳐서 행해지고 제조 방법도 개선되었지만,

설계상도 상당한 변경이 있던 것 같다.
이 카메라의 다음에 양산에 들어간 「니코마트 EL」에서도,

역시 양산 시작이 행해져 그 이후로 이 프로세스는 정착하는 것이다.
롱런의 「니콘 F」에 대해서는, 당연한 일이라든지 모델 체인지의

소문이 끊어지지 않았다.

저널리즘의 예측 기사에서는 카메라명을 「니콘 G」라고 하는 것이 많았다.

S」, 「S2」, 「S3」와 같이, 부가 번호를 늘려 가는 명명법은

제품 계열이 이해해 쉬운 반면, 신형으로서의 진보가 작은 인상도 있다.

일본 광학에서는 괴로워한 끝 정통적이게 「F2」라고 이름 붙였다.
만약, 여기서 「G」라고 하고 있으면,

F3」는 「H」, 「F4」는 「J」,F5 가 「K」라고 되는 운명에 있었다.

실력의 「F2」
 
1971(쇼와 46) 년 9월 21일의 「니콘 F2」의 발표·발매는

선대 F 가 위대할 뿐(만큼)에 큰 주목을 끌었다.
일신 된 조작계가 특히 호평으로 크게 기능 향상한

모터 드라이브도 또 보디 이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약간 늦어 「포토 믹S」finder나 「EE콘트롤 유니트」도 완성했다.

이것들은 초저휘도에서의 측광이나 자동 노출 등 「F2」의 기능을

한층 더 확대하는 것에서 만났다.
그러나 카메라 평론의 입장으로부터는 「의외로 수수하고 보수적인 모델 체인지」

라는 견해(보는 방법)도 있었다.

외관적으로는 「환구 된 「Nikon F」」라고 해인가 안보였던 것일까도 모른다.

Nikon F2 Photmic AS」
+「MD-2」+「250 필름 백」
+ EE콘트롤 유니트 「DS-12」
그러나, 지금까지 말해 온 것처럼 「니콘 F2」의 개발과 생산은

명기" 「니콘 F」의 후계기를 낳는데 적격인 일대 프로젝트였다.

모든 성능에 대해서 「 좀 더 빠르고· 좀 더 강하게」라고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사회나 기술의 모든 지표가 아직 급속히 성장하고 있던 1970년대를

상징하는 카메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매월의 생산 실적은 F 보다 많이, 실제의 사진 촬영의 장소에 있어도 대활약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곧 거기까지 오고 있던 전기 셔터 시대의 발소리에 싹 지워져

그 때에는 약간 수수한 존재로 보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메카니컬 카메라가 다시 봐져 콜렉션은 아니게 실제의

작품 촬영을 위해서(때문에) 사용되는 것이 많아 지고 있다.
그 중에「 「F2」는, 가장 실용적이고 사용하기 쉽게 튼건?일안레플렉스이다」

라고 말해지는 것이 있다.

역사가 이 일대 프로젝트를 제일 정확하게 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파인더 세개의 사진을 올렸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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